pISSN: 1229-0750
대동철학 (2009)
pp.137~162
「巍巖記」에 나타난 巍巖 李柬의 생애와 학문
이 글은 2004年度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 지원사업인 “충남지역 마을 공동체의 생애와 정체성”(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의 일환으로 작성된 성과물이다. 연구 대상 마을인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는 조선조 3대학술 논쟁 가운데 하나인 ‘인물성동이론’의 동론을 주창한 외암 李柬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에 본고는 마을사 연구의 주제에 부응하기 위해 학술논쟁에 대한 언급 보다는 제2장에서 李柬의 외암 마을의 인문지리환경보고서라 할 「巍巖記」를 통해 외암 마을의 주변 환경을 소개하는 한편, 제3장에서는 「巍巖記」와 「家狀」을 통해서 李柬의 가계 및 생애, 그리고 종계서문을 통해서 그의 가문의식을 고찰했다. 이어서 제4장에서는 「巍巖記」上에 나타난 李柬의 학문을 고찰한 바, 李柬 자신이 밝히고 있는 학문연원 및 학통을 살펴보았고, 그의 평생의 학문적 동반자가 尹泉西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家狀」을 통해서는 杞園 魚有鳳, 古朴齋 趙泰萬, 困村 申憼, 晦谷 申愈 등의 교우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遂庵 權尙夏는 李柬의 스승이고, 그가 집지하기 시작한 것은 31세부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 李柬의 스승으로는 沙川에 살고 있는 厚齋 金幹(1646-1732)과 서울의 金農巖(1651-1708)과 金三淵(1653-1722) 등임이 밝혀졌다. 그는 자신이 스승으로 삼은 이들을 하루 또는 이틀에 걸쳐 도를 논하고 돌아오는 것을 常例로 여겼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18세기 巍巖 마을을 대표하는 儒學者가 바로 李柬이었고, 韓南塘과는 호락논쟁을 통해 그의 학문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물성동론은 스승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자신의 고향에서 평생의 지기인 尹泉西와 함께 遯世无悶하는 君子的 삶을 살았다. 그의 이러한 삶은 그가 손수 작성한 「巍巖記」라는 외암 마을의 인문지리환경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본고는 “충남지역의 마을 공동체와 생애와 정체성”이라는 연구주제 하에 작성된 글이기 때문에 李柬의 한국 성리학적 위상 및 내용, 특히 18세기 호락논쟁의 주인공이면서 기호낙론을 계승한 학자인 동시에 그의 학문이 후일 북학사상에 연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그것의 구체적 논구는 미루었다.